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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수메르 이전의 기록자들 - 선(先) 문자 시대의 상징과 도상들
문자가 나타나기 전, 인류는 어떻게 기록했는가?
우리는 흔히 ‘문명 = 문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최초의 문자가 등장하기 전에도 인류는 이미 복잡한 정보 전달 수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4천년경 수메르에서 쐐기문자(cuneiform)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류는 기호, 도상, 상징을 통해 기억하고 기록하는 문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 시기를 ‘선문자 시대(Proto-writing period)’ 또는 ‘전(前)문자 시대(pre-literate era)’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의 유물들은 완전한 문자 체계는 아니지만, 일정한 의미를 담고 반복적으로 사용된 시각적 코드 체계로 간주됩니다. 즉, 현대의 문자에 이르는 중간단계의 기록 장치들이었던 셈입니다.
가장 오래된 기호들, 빌렌도르프에서부터 초승달 기호까지
수메르 이전의 기록자들 1. 구석기 시대의 기호와 패턴
가장 오래된 도상 기록은 구석기시대의 동굴 벽화, 석기, 조각상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쇼베 동굴(Chauvet Cave)이나 라스코 동굴(Lascaux)에서는 동물과 사람의 형상을 비롯해 추상적인 점, 선, 격자무늬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예술 표현을 넘어서 사냥, 계절, 성스러운 의례 등 기억하고자 한 구체적인 ‘의미’를 담은 표현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고고학자들은 주기적인 점 배열, 선의 반복, 손 도장 등이 일정한 패턴으로 나타나는 것을 주목하며, 이를 **‘시각 언어의 원형’**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2.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신체 기호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된 기원전 28,000년경의 조각상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of Willendorf)**는 생식 능력, 풍요, 모성 등의 의미를 내포한 상징적 대상입니다. 이처럼 선문자 시대의 ‘조각’은 단순한 미술품이 아니라 문화적 메시지였으며, 특정 공동체의 상징체계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농경 사회와 함께 등장한 기호의 조직화
1. 우바이드와 하라프 전기의 상징체계
기원전 6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우바이드(Ubaid) 문화는 조직화된 농경과 정착을 시작한 대표적인 문명입니다. 이 시기의 유물에서 나타나는 도자기 기호, 돌판에 새겨진 추상 문양, 특정 도형 배열 등은 아직 해독되지는 않았지만 반복적이고 체계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라파 전기(Indus Early Phase) 유물에서도 비슷한 기호들이 나타나며, 이는 훗날 인더스 문자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기호의 조직화는 농경의 시작과 함께 본격화되었으며, 잉여 생산, 재분배, 재산 기록 등의 필요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 탈리오 형상과 상징: 인장과 물물교환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인장(seal)이나 특정 형상의 토큰(token)을 통해 물건을 교환하거나 수량을 기록하는 방식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예컨대 기원전 8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작은 점토 토큰을 이용해 물자의 양이나 종류를 표시했으며, 이는 훗날 수메르 쐐기문자의 회계 기록 방식으로 발전합니다.
도상에서 문자로: 선문자의 결정적 진화
‘문자’의 정의는 단순히 기호가 아닌, 언어의 요소를 체계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구조를 포함해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선문자는 ‘문자 이전 단계’로 분류되며, 그 **핵심적 특징은 “의미가 있으나 소리와 분리된 기호”**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일부 선문자 체계는 특정 개념을 음절 수준의 추정과 결합하거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규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후대 문자의 구조적 기초가 됩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 타르타리아 도판(기원전 5500년경, 루마니아): 유럽 지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기호 체계로, 일부 학자들은 이를 ‘유럽의 가장 초기 문자 시도’로 간주합니다.
- 빈차(Vinča) 기호: 추상적 기호와 도형의 체계적인 조합으로, 농경사회의 물물교환 및 의례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 제브 제레 가리(Zeb Zehra Gari) 토큰: 구체적 수량, 물자 분류, 수취인까지 추정 가능한 기호 구조를 갖춰 문자와 가장 유사한 형태로 평가됩니다.
선문자가 현대에 주는 의미
선문자 체계는 단지 문자로 가는 진화의 중간 단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류의 표현 욕구, 기억의 기술, 정체성의 기록 방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현대에도 이와 유사한 시스템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 이모지(emoji): 소리 없는 의미 전달 도구로, 시각적 상징이 언어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대체하는 사례입니다.
- 지하철 노선도, 공항 안내 아이콘: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시각 언어로, 문해력에 관계없이 정보를 전달합니다.
이처럼 선문자는 단지 고대 유물의 흔적이 아니라, 언어 이전의 인간 사고방식과 기억의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 코드입니다.
문자 없는 시대의 기록자들
수메르 이전, 인류는 문자가 없었다고 생각되었지만 실제로는 풍부한 상징과 도상을 통해 세상을 표현하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언어와 문자의 진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이며, 동시에 인간의 창의력과 소통 본능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선문자들의 단서를 통해, 문자 그 이전의 인류 사고를 다시 복원해보려 합니다. 그들의 언어는 침묵했지만, 그들의 상징은 아직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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